오랜 세월이 만든 시흥의 바다
갯골의 가을은 맑고 맛나다
계절이 이렇게 깊어진 줄 몰랐다. 좀처럼 식지 않을 것만 같던 여름의 열기는 어느새 선선한 바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머리 위로 맹렬하게 쏟아지던 햇살마저 머리카락 끄트머리로 온화하게 휘감겨온다. 어디를 둘러봐도 완연한 가을이다.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 시흥, 육지 깊숙한 곳까지 깊게 팬 갯골 양쪽으로 농익은 계절의 향기가 스몄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경기도 시흥으로 무슨 여행을 가냐고 물었던 스스로가 얼마나 우매했는지 저 풍경이 보여주고 있었다. 시흥의 갯골생태공원. 주말을 맞아 이곳을 찾은 많은 이의 얼굴에는 평온함이 가득했고,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길섶 해바라기와 그 곁을 메운 키 작은 풀마다 생명의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이곳을 찾길 잘했다, 그런 마음이 물씬 밀려왔다. 공업도시로만 생각했던 이 땅은 자연과 사람이 서로 곁을 내주며 공존하는 자리로 변모해 있었다.
시흥은 경기도 유일의 내만 갯벌을 가진 도시다. 내만 갯벌은 바다가 육지 깊숙한 곳에 만들어놓은 독특한 지형이다. 갯골이라고도 부르고 갯고랑이라고도 한다. 육지 안쪽으로 수 킬로미터를 밀려든 바다는 들어왔던 길을 따라 되돌아 나가며 육지의 바닥을 움켜쥐고 생채기를 냈다. 수만 년을 들락거리며 바다와 육지가 밀고 당기는 동안 고랑은 제법 깊고 너른 물길이 됐다. 조수 간만의 차가 수 미터에 이르는 서해가 멀찌감치 물러날 때마다 그 물길은 바닥을 드러낸다. 움푹 팬 그 자리에는 바다가 생명을 심어두었다. 해양 생태계를 이 육지 안쪽에서 보게 될 줄 몰랐다.
갯골생태공원은 그 갯골을 따라 조성한 생태계의 보고다. 데크를 따라 걷는 동안 발아래로 농게, 참방게, 망둥어가 노닌다. 갯골의 물이 빠지면 육지 속 바다에 얼마나 많은 삶이 기대어 살아가는지 깨닫게 된다. 그뿐인가. 모새달 군락이니 칠면초, 갯개미취, 나문재, 퉁퉁마디 같은 온갖 희귀한 식물도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말 그대로 생명의 밭이다.
육지 안쪽까지 바다가 들어오니 염전을 만들기에도 제격이었을 테다. 과거 일제강점기, 이 일대는 소래염전이라 불리며 엄청난 양의 소금을 생산해냈다. 1934년이 그 시작이었다. 당시 소금을 수탈하기 위해 깔린 철도가 수인선이다. 1995년 그 철로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자 수십 년을 이어오던 염전도 이듬해 문을 닫았다. 148만㎡(약 45만 평)에 달하는 드넓은 폐염전 부지는 그렇게 사람들의 눈길에서도 멀어져 갔다. 오랜 시간 방치돼 있던 이 땅이 공원으로 조성되며 다시 사람이 돌아오기 시작한 건 2012년의 일이다. 그로부터 7년여. 잊힌 그 땅은 이제 아름다운 공원이자 생태계의 보고로 되살아났다.
산책하듯 느린 걸음으로 공원을 걷는다. 갯골생태공원은 볼 것도 많다. 오래전 사용하던 폐소금창고가 눈을 사로잡는다. 흘러가버린 옛 시간의 기억은 오로지 저 소금창고만이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이 공원의 랜드마크는 목조로 지은 흔들전망대다. 센 바람이 불면 흔들흔들 흔들려서 흔들전망대인데, 이름만 듣고 겁낼 필요는 없다. 나선형 통로를 따라 올라간 전망대 꼭대기에서 갯골을 내려다본다. 바다의 흔적이 깊숙하다. 자연이 조각해놓은 예술품은 멀리 떨어져서 볼수록 더 잘 드러나는 법.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는 비경이 그곳에 있었다.
마음을 물들이는 붉은 노을
시흥에서 가장 각광받는 여행지 중 한 곳은 오이도다. 시흥의 서쪽에 자리한 오이도 해변은 풍부한 갯벌 생태계 덕에 선사시대부터 사람의 흔적이 많이 남았다. 과거 섬이었던 시절 이곳에서는 섬 전체에 걸쳐 패총이 발견됐다. 지금도 오이도 일대가 조개구이로 유명하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 지역이 가진 특징은 지금도 유효한 셈. 사람이 많이 모이는 오이도 해변 바로 뒤에 선사유적공원이 있다.
적당히 봉긋하게 솟아오른 그 언덕 위에 올라 바라보니 물이 빠져나간 갯벌이 무척 넓다. 얼핏 봐도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바다가 그대로 갯벌이 되었다. 오래전의 사람은 아마도 그 갯벌을 따라 바다의 복판으로 나아갔으리라. 그곳에서 풍족한 갯벌 생태계를 뒤져 조개를 캐내고 주린 배를 채우지 않았을까. 1960년대부터 발굴한 패총은 6개 지점 12개소에 달한다. 오이도 선사유적공원은 오이도와 경기도 시흥 일대에서 발견한 패총 유적지를 소개하고 그 문화와 생활사를 엿볼 수 있도록 조성한 곳이다. 야트막한 산등성이를 타고 산책하듯 걸으며 선사시대의 의식주와 특징을 쉽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이 공원의 백미는 패총전시관이다. 고분의 석실을 연상케 하는 내부로 들어서면 규모는 크지 않지만 발아래로 패총 유적을 보존해놓았다. 정면에는 패총의 단면을 전시했다. 난간을 두고 그 아래에 유적 발굴 현장을 재현해두었는데, 버튼을 누르면 이곳을 스크린 삼아 미디어 파사드가 펼쳐진다. 패총 유적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등의 내용을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이해하도록 화려한 애니메이션으로 구성했다.
이제 시흥 여행의 절정을 맞이할 시간이다. 빨간 오이도 등대 옆에서 서서 낙조를 기다린다. 오이도의 서쪽 끝, 바다를 향해 늘어선 방파제 위에서는 멀리 저물어가는 태양의 궤적이 선명히 보인다. 저녁이 가까워질수록 등대 주변으로 인적이 늘어난다. 선착장으로 들어가는 방파제 길목의 간이횟집 위로 갈매기 떼가 날갯짓하며 춤을 춘다.
방파제의 오른쪽 황새바위길부터 천천히 바다의 경계를 따라 걸으며 청명했던 하늘이 주홍빛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봤다. 빨간 등대와 함께 오이도의 명물로 손꼽히는 건 생명의 나무다. 생명의 나무 곁에 서면 바다 건너 소래포구와 인천 송도 스카이라인이 파노라마처럼 눈에 들어온다. 다시 빨간 등대 근처에 다가왔을 무렵, 태양이 어느새 지평선 바로 위로 내려와 있었다. 이제 태양의 움직임은 빨라질 것이다. 이 순간, 바다와 육지의 경계에 선 모든 사람이 태양의 마지막 움직임을 목도하고 있었다. 하늘이 붉게 타들어가는 짧은 순간이 지나고 저 멀리로 마지막 광선이 잠길 때, 그 장엄한 의식은 입가에서 말을 지웠다. 도심에서 갯골까지, 온 세상이 오렌지빛으로 물들어가는 아름다움은 쉽게 지우지 못할 잔상으로 남았다.
시흥 연 요리의 정수
시흥에서는 무얼 먹어야 할까. 적잖이 망설였다. 좀처럼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해변을 따라 조개구이 전문 식당이 성하고 그 사이마다 바지락 칼국수집이 늘어섰지만, 시흥을 대표할 만한 게 과연 그것뿐일까 싶었다. 이리저리 찾다 보니 의외의 음식이 눈에 들어왔다. 연 요리. 한여름 연못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연꽃은 가을에 훌륭한 식재료를 내놓는다. 연꽃의 씨앗인 연자와 뿌리인 연근. 이 둘은 농익어가는 이 계절에 어울리는 재료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계절의 맛을 찾아 차를 몰았다.
시흥의 연 요리는 연꽃테마파크가 있어서 가능했다. 관곡지라는 역사 깊은 연못을 따라 연꽃테마파크가 조성돼 있는데, 기록에는 이곳에 연지를 조성한 조선 전기의 농학자 강희맹의 이야기가 그 시초가 된 것으로 남아 있다. 강희맹은 세조 9년 명나라를 다녀왔다. 당시 남경에 있는 전당지라는 연지에서 연자를 채취해 지금의 시흥시 하중동 관곡에 뿌렸다고 기록은 말하고 있다. 시흥과 가까운 안산 일대까지를 묶어 안산군이라는 지명으로 불렀는데, 1466년 세조 12년부터 이곳을 ‘연성(蓮城)’이라는 별호로 불렀다는 사실도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얻은 연자와 연근은 가까이에 있는 식당에서 연 요리로 만들어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름 높은 집이 ‘장금이’다. 동명의 드라마 주인공 이름을 식당에 쓴 것으로 봐서 그 의도는 충분히 알겠으나, 한편으로는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것도 사실. 하지만 맛으로 보자면 대장금 솜씨 못지않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요리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연 요리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엿보인다. 결코 작지 않은 집인데도 식사 시간이 되면 가게 안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메뉴는 코스 요리로 구성돼 있다. 전채로 내주는 연자 타락죽부터 맛이 범상치 않다. 타락죽 특유의 부드러움과 연자의 고소함이 잘 어울린다. 이어서 내주는 일품요리들은 하나같이 눈을 즐겁게 만들 뿐 아니라 맛도 일품이다. 메뉴마다 연근과 연자를 적재적소에 잘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눈에 띄는 대목. 연근연자샐러드, 연자단호박전병 같은 음식은 감탄을 불러일으킬 만큼 맛이 좋다. 대체로 맛의 농도가 과하지 않아 더 마음에 든다. 정갈한 한 상으로 여행의 대미를 말끔하게 마무리한 느낌이다.
이곳을 이끌고 있는 전명화 사장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 메뉴를 만들어왔는지가 코스 전반에 걸쳐 잘 느껴진다. 그는 연 요리가 가진 맛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전남 무안, 충남 부여 등 곳곳을 찾아다니며 배우고 또 배웠다고 했다. 그런 노력의 결실이 가을의 연자처럼 맛깔나게 여물었다.
■ 갯골생태공원
시흥이 자랑하는 습지보호지역 1급의 청정 생태공원이다.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내만 갯벌과 옛 염전의 정취를 느낄 수 있어 주말이면 가족 단위 여행객이 많이 찾는다. 나문재, 퉁퉁마디 같은 염색식물이나 붉은발농게, 망둥어 등을 관찰할 수 있다. 금개구리, 맹꽁이 같은 희귀종도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다.
주소 경기 시흥시 동서로 287
문의 031-488-6900
■ 연 요리 전문점 장금이
연을 이용한 요리로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은 연 요리 전문점이다. 코스 요리를 주력으로 하고 있는데, 모든 메뉴에 연자나 연근, 연잎이 들어간다. 연자 가루를 넣어 만든 타락죽부터 연근연자샐러드, 연근튀김까지 모든 메뉴가 각자의 맛이 확실하다. 계절에 따라 재료에 맞춰 메뉴 구성이 조금씩 달라진다.
주소 경기 시흥시 피울길 167
문의 031-484-6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