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중년 남성,
왜 성추문을 일으킬까?
문제는 젠더 감수성!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또 흠결없이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 대가로 큰 성공을 거뒀고,
아주 높은 자리에 올랐다.
더 높은 곳도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한 순간에 무너진다.
말 몇 마디 때문에
차별주의자가 됐다.
그렇다고
억울해 하면 안 된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조심스러운 시대다.
더 큰 문제는
젠더 문제를 일으키는
누군가를 비난하면서
정작 자신이 젠더 감수성이
떨어지는 사람이라는 점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
혹시 당신은 어떤가?
회식 자리에서 이런 말 한 적 있는가?
요즘 세상 많이 좋아졌잖아.
이제 여권신장은
될 만큼 된 거 아냐?”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부장님, 여혐 발언이에요.
부장님은 젠더 감수성이 부족합니다.”
당황했는가.
여자를 좋아하면 좋아했지
혐오한 적이 없는데, 혐오라니?
후배들로부터 존경받고,
자식들로부터 존중받고 싶지 않은가?
멋진 선배, 좋은 아빠로
불리고 싶지 않은가?
오랜 세월 바쁘게 달려온 당신,
그 노고를 인정받고 싶지 않은가?
후배들로부터 ‘멋진 선배’,
자식들로부터 ‘좋은 아빠’로
불리고 싶지 않은가?
그런데 웬걸,
무심코 뱉은 몇 마디 말 때문에
차별주의자, 혐오주의자가 됐을 뿐 아니라
후배들의 뒷담화 속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평소 후배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나 돌아보자.
“남자친구 있니?”
“결혼은 왜 안 하니?”
‘얼평(얼굴 평가)’은 어떤가.
“굿모닝! 오늘은 좀 부었네.”
“화장이 잘 먹었네.”
“그 립스틱 바르니 예쁘다.”
젠더 감수성 ‘빵점’짜리 말들이다.
이런 말들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친밀함의 표현인데 뭐가 문제냐고?
듣는 입장에선 전혀 친밀하지 않다.
젠더 감수성(Gender Sensitization)
또는 젠더지수(Gender Quotient),
다른 젠더의 입장이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인권 감수성의 하위 덕목.
21세기 지성인의 필수 덕목이다.
젠더 감수성이 높은 사람은
‘젠더’(후천적으로 획득한 사회적 성)
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을
하나의 주체이자 개성적 존재로서
존중할 가능성이 큰 반면,
이게 낮은 사람은
본인 의도와 상관없이
타인에게 상처를 줄 확률이 높아진다.
의도? 성차별적 언어 사용의 핑계일 뿐
나쁜 의도는 없었어요.
나쁜 의도로 한 말이 아닌데
뭐가 그렇게 문제냐고
항변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차별과 혐오의 언어를 두고
의도를 운운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일도 없다.
의도는 중요한 게 아니다.
생각해보라.
“민중은 개돼지”라고 말한
고위 공직자가 논란을 수습하며
했던 말이 무엇이며
(2016년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
아프리카계 유학생에게
“연탄색이랑 얼굴색이랑 똑같네”라고 한
국회의원이 변명처럼 내놓은 말이 무엇인지
(2015년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
녹음파일처럼 빼다 박은 그 말은 바로
“나쁜 의도는 없었다”라는 말이다.
자신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해주길 원한다면,
상대에게 전달을 잘해야 한다.
의도를 가진 사람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해놓고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불쾌해할 권리는 없다.
불쾌할 권리는 발화자가 아닌,
그 말을 들은 청자에게 있다.
나는 너한테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사람
아니야?
조직의 폭력 가해자들이
뉘우치지 않는 이유는
‘나는 너한테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사람’
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피해자가 불쾌함을 내색하는 순간,
문제가 된 언행을 ‘악의 없는 장난’으로
눙치려고 하거나
‘어쭈, 감히?’라며 괘씸해한다.
상대를 불쾌하게 하는 게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상대가 불쾌해할 땐
진심으로 사과한 뒤 조심하면 그만.
길을 걷다 남과 부딪히면
부딪힐 의도가 없었더라도
곧장 사과하라는 소리만큼
상식적인 말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