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삶을 위한 예찬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 역시 별다른 기대를
품기에는 평범한 하루하루.
이런 일상이 무료할 때쯤
예기치 않은 사건사고가
일상을 흔들기도 한다.
이 역시 숱한 하루 중 하나.
가까운 곳에서 작은 행복을 찾은,
부러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본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저서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SNS에 중독된 현대인들이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고독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만들며, 반성이나 창조뿐만
아니라 인간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다.
오늘날 삶의 위기에 맞서기 위해선 오히려
고독을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바우만은 “고독의 맛을 결코
음미해 본 적이 없다면 그때 당신은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놓쳤으며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고 충고한다.
우리는 타인과 휴대폰, SNS 등을 통해
매 순간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럴수록 더욱 깊은 외로움에
빠져들며 불안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바우만이 얘기하는 고독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즉, 고독하다. 고로 우리는 존재할 수 있다.
이런 고독의 순기능은 바로 영화 속에서
심플하고 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에 깃들어 있다.
우베르토 파솔리니 감독의
<스틸 라이프>(2013)에는
40대 중반의 존 메이(에디 마산)라는
지극히 평범한 공무원이 등장한다.
조용한 그는 런던 케닝턴 구청 소속으로
홀로 죽은 사람들의 장례를 치르는 일을 한다.
고인의 가족이나 지인을 찾아 다니며
장례식에 초대한 후 유품을 단서로
추도문까지 작성한다.
때때로 아무도 오지 않으면
홀로 망자를 떠나 보내기도 한다.
그는 홀로 세상을 떠나는 이들을
기억해 주는 마지막 사람이다.
어느 날 구청에서 정리해고가 된 메이는
마지막으로 접수된 빌리 스토크의
장례를 위해 지인들을 수소문한다.
이렇게 그가 고인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고 만나는 것 자체가 애도와 추모를
경유해 삶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단조로운 삶을 사는 메이는
고인과 관계가 끊어지는 사람들의
연결고리를 회복하는 일에 작은 보람을 느끼며,
그 과정에서 자신도 희망을 찾는다.
하네스 홀름 감독의
<오베라는 남자>(2015)에서
43년 동안 근무한 오베(롤프 라스가드)는
직장에서 해고 통지를 받은 후
죽은 아내 소냐를 따르려고 마음 먹는다.
고집불통 노인 오베는 매사에 불만투성이다.
삶에 더 이상 미련이 없는 그는 수차례 자살을
시도하지만 이웃집에 이사 온 패트릭과
파르바네 부부가 나타나 훼방을 놓으며
모두 불발로 끝난다.
그는 마음 놓고 편하게
자살도 할 수 없는 처지다.
차량 출입금지 같은 마을의 규칙만
보수적으로 항변하던 그는 이웃집 부부를
돕다가 점점 닫힌 마음을 열게 된다.
심지어 길고양이나 집에서 쫓겨난 청년을
식구로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어느새 동네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문제를
처리하는 만능 해결사가 된 오베는
동네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한다.
결국 혼자 못사는 것이
그의 재주이자 축복이다.
어쩌면 메이와 오베는
자신의 숙명적인 고독을
인생에 대한 통찰로 연결한
인물이라 칭할 수도 있다.
고독한 일상을 짊어진 그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을 겪지만,
오히려 이런 시련은
부활절 달걀 같은 선물이다.
무엇보다 타인들과 함께 삶과 죽음을
공유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반면 아름다운 일상의 소중함을 간직한 채
연인과 함께 하는 노년 커플도 있다.
조엘 홉킨스 감독의 <햄스테드>(2017)는
평범한 삶을 추구하는 에밀리(다이앤 키턴)와
홀로 자연인처럼 살아가는 도널드
(브렌던 글리슨)의 러브 스토리다.
1년 전 남편을 잃고 금전 문제에 시달리던
에밀리는 우연히 망원경으로 숲 속의
오두막에 사는 도널드를 살펴보다가
위기에 처한 그를 도와준다.
이를 계기로 에밀리는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도널드에게 호감을 갖고,
이들은 칼 마르크스의 무덤에서 만나
식사를 즐기면서 사랑에 빠진다.
그러던 중 도널드는 17년 동안 살던
오두막이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에밀리의 도움을 얻어 법정에서
소유권을 주장한다.
도널드의 보금자리를 지키는 과정에서
에밀리는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며
위선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자신에
어울리는 전원 주택으로 이사를 한 후
새 삶을 시작한다.
도널드 역시 자신의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오두막을 고스란히 지키는 동시에
에밀리와의 사랑을 굳건하게
유지할 수 있는 놀라운 선택을 한다.
이들은 돈이나 세상의 인정보다
중요한 것을 알고 있다.
스스로 강하고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또 다른 커플은 런던이 아니라
뉴욕에서 만날 수 있다.
리처드 론크레인 감독의
<브루클린의 멋진 주말>(2014)은
40년 동안 맨해튼의 이스트 빌리지 아파트에서
함께 한 노 부부, 알렉스(모건 프리먼)와
루스(다이앤 키턴)의 이야기다.
루스는 5층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힘든 알렉스를 위해 엘리베이터가 있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가려고 한다.
하지만 이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소중한 보금자리와 함께 한
추억의 시간을 떠올린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원래대로
집(그들의 터전!)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내는 것을 선택한다.
이 커플이 아파트 옥상 정원에서
여유를 즐기거나 창가에서 고색창연한
브루클린의 전경을 바라보는 모습은
일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깨닫게 만든다.
소소한 삶에서 행복을 찾는 이들은
우리에게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되묻게 한다.
그것은 세상의 시선이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나에게 어울리는 일상과 편안한 숨결,
그리고 나만의 걸음걸이를 찾는 것이다.
그것이 꼭 찬란할 필요는 없다.
전종혁
영화 전문지 <프리미어> 기자 출신
영화평론가 겸 <비욘드> 편집장.
영화진흥위원회 매거진<한국영화>에서
한국 영화산업에 대한 기사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