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듣고 사진 찍으며
책에서 길을 찾는 커피 로스터
브라보 중년, 경성현
그의 명함에는 ‘무엇’이 참 많다.
바리스타 로스터, 재즈 칼럼니스트,
포토그래퍼, 철학과 인문학과 책.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한 줄이
대문처럼 걸려 있으니 바로
‘LET’S TALK ABOUT…’이다.
직업, 취미, 일, 놀이,
프로페셔널과 아마추어리즘이
구분 없이 기분 좋게 섞여 있다.
어디서든, 누구라도, 무엇으로든 만나고
나누고 싶은 경성현 씨의 삶으로 들어간다.
커피 맛이 나는 사람,
사람 향이 나는 커피
먼저 바리스타 로스터부터 시작해보자.
경성현 씨는
1990년대에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커피를 워낙 좋아했던 그가
출장지 독일에서 맛본 에스프레소는
여태와는 전혀 다른
커피의 신세계를 보여줬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온전히 기억할 수 있다.
입술을 적신 후 혀를 지나
목을 타고 흐르던 그 맛과 향,
그 순간의 거리 풍경과 카페 안에
울려 퍼지던 음악까지.
그 이후 터키와 이집트에서
진짜 커피를 접하고는
그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국내에서는 바리스타라는 개념이
아직 생소하던 시기에 일찍이
커피를 공부하고 자격증을 땄다.
그래도 커피로 직업을 삼을 줄은 몰랐다.
커피가 너무 좋아서 시작했을 뿐이다.
제일 좋아하는 취미가 일이 된,
이른바 누구나 부러워하는 로망이
경성현 씨에게는 현실이 되었다.
바리스타가 되어 커피를 내리고
커피를 주제로 한 토크 콘서트를 열고
재즈와의 컬래버레이션 작업도 시도했다.
지금은 바리스타 훈련에 집중하는데
그중 하나가 성남시 정신보건센터에서
위탁을 받아 정신 장애인 바리스타를
양성하는 일이다.
한번은 소방관을 대상으로
커피 강의를 한 적이 있다.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심리 치료와 병행했는데
소방관들이 커피를 직접 내리고
아이처럼 좋아하는 것을 보며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되는 걸 알았다.
“커피의 매력은
수많은 변수에 의해
맛을 창조할 수 있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커피를 추출할 때마다
늘 기대가 되고 설레죠.
커피 맛은 순전히
개별적 경험이기 때문에
‘좋다’, ‘나쁘다’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아요.
서로 다른 맛이 존재할 뿐이죠.
이를테면 차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다양한 경험은
단순히 커피 맛과 향을
주관하는 것을 뛰어넘었다.
사람과 커피를 연결한다.
사람 향이 나는 커피를 내리고
커피 맛이 나는 사람을 잇는다.
그래서 커피는 혼자 마실 때보다
상대와의 교감이 이뤄질 때
한 잔의 가치가 제대로 완성된다고 믿는다.
들을 때마다 다른 재즈,
살 때마다 다른 인생
경성현 씨의 재즈 인생은
고등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친구들이 사춘기의 질풍노도를
팝송에 실어 몸과 마음을 흔들어댈 때
그만은 달랐다.
고등학교 2학년 가을,
종로 거리를 거니는데 한 음반 가게에서
처음 듣는 곡이 흘러나왔다,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끝까지 들었다, 그의 인생은
그 순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장르와 테마가 정해진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음악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홀리듯 가게로 들어가서 음반을 샀죠.
그 음악이 바로 마일스 데이비스가 부른
‘So What’이었습니다.
‘So What’은 내 인생의 음악이자
인생철학이 되었습니다.
‘그게 뭐~’라는 기저가
제 인생을 여기까지 이끌어온 거죠.”
재즈는 꾸역꾸역 다닌 것 말고는
기억이 없는 회사 생활을 버티게 한
구세주이기도 했다.
강남역 한복판에 자리한 회사 근처에는
대형 레코드 가게가 있었다.
그곳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의미 없는 10년 직장 생활이었지만
그곳에만 가면 꿈과 환상에 빠질 수 있었다.
원더랜드였다. 30대 청춘을 오롯이
그곳에서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아침 회의와 간단한 업무를 마치면
그곳으로 가기 일쑤였어요.
심지어 회사에서 누가 저를 찾으면
여직원이 나를 부르러
레코드 가게에 왔을 정도였죠.
날 가두어버린 게토 같은 직장에서
레코드 가게는 도피처 같은 의미였어요.
그때 접한 재즈 라이브러리가 엄청났어요.
그 덕을 지금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그는 재즈 칼럼니스트다.
또한 재즈 강사이자 기획자이기도 하다.
현재 부천평생교육센터에서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퇴근 학습길’
프로그램에서 재즈 강의를 담당한다.
시대 변혁과 함께한 재즈의 스타일별
흐름과 특징 등을 인문학적 배경 설명과
더불어 강의하고 재즈를 감상한다.
‘2019 수주문학제’에서는
재즈 큐레이터로 나섰다.
수주 변영로 시인 문학제의 일환으로
진행된 전시에서 변영로의 시 30편에
각기 어울리는 재즈를 고르고
코멘트를 달았다.
재즈곡은 시를 낭송할 때마다
운율을 살려주는 훌륭한 배경이 되었다.
“변영로 시인의 시 중에
‘기로니’라는 작품이 있어요.
읊어보면 이래요.”
‘꽃이 곱기로니 그대 얼굴 보담이야
진주가 귀타 하기로니 그대 눈에야
석류 속 붉다기로니 그대 입술에야
비단이 가볍기로니 그대 걸음에야
그러나 구름빛 아무리 잘 변한대야
헤아리지 못할 그대의 마음보다야.’
“이 시에는 키스 자렛의
‘Be My Love’를 연결했어요.
키스 자렛이 병으로 연주를 쉬고 있을 무렵
아내를 위해 집에서 녹음한 앨범
<The Melody At Night, With You>에
수록된 곡이에요.
조용히 건반을 누르는 키스 자렛 옆에
그의 아내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서 있을 것 같은 분위기가
시 ‘기로니’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죠.”
그 외에도
‘꿈 팔아 외롬 사서’라는 시가 있는데
여기에는 브래드 멜다우의 ‘Alfie’를 붙였다.
꿈은 늘 멀고 외로움은 언제나
삶 가까이에 있다. 그럴 바에야
시인은 꿈을 팔아 대신 외로움을
사서 살자 한다.
꿈과 외로움 사이에 존재하는
그 틈을 브래우 멜다우의 피아노가
성글게 메워준다.
어느 순간 꿈이 외로움이 되고
외로움이 꿈이 된다’라고
코멘트를 달았다.
저마다 읽는 시도
듣는 재즈도다르겠지만
그는
“시를 읽는 감상자는
시적 은유로 인해 자기화가 가능하죠.
재즈의 특징인 즉흥성은
들을 때마다 다른 곡처럼 들리게 하고요.
둘 다 감상하는 주체에 의해
개별적인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런 면에서 재즈와 시는 닮았어요”
라고 말한다.
그게 뭐 어때서?
커피와 재즈도 공통점이 많다고 했다.
“커피와 재즈도 서로 닮았습니다.
사람들의 기호를 충족시켜주는
취향의 관점, 일상의 아름다움,
행복감, 가벼운 기대감에
들뜨게 한다는 점이 그렇죠.
어떤 것이 더 좋은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차이만이 존재하는 것,
그것을 인정하면서
개성을 확보하는 여유는
한마디로 멋진 거죠.”
그는 <만화저널 세상을 봐>에
‘경성현의 재즈 부르잉’을,
전문지 <서울 의사>에는
재즈를 주축으로 커피와 문학을
녹여낸 칼럼을 게재한다.
이 밖에도 기업체와 문화센터,
카페, 서점 등에서 재즈 강좌나
감상회를 진행하기도 한다.
경성현 씨는
테두리 안에 가두지 않는 다양성이
커피와 재즈의 진정한 멋이라고 했다.
하나도 아닌 그 둘을 베이스로 삼아
섞고 녹이고 응고하고 농축하며
그는 하루도 똑같지 않은 하루를 산다.
이토록 재즈다운,
커피 같은 인생을 유감없이 산다.
커피가 수많은 변수에 의해
맛이 결정되듯 재즈 역시
같은 곡이라 하더라도 연주에 따라
완전히 달리 해석할 수 있다.
개별성이 두드러진다.
중년의 삶도
이와 같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한 사람의 인생은
일괄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개별적 역사가 있다.
슬픔, 기쁨, 행복, 고통 등
모든 일화가 개별성을 지닌다.
완벽히 갖추어진 삶이냐 아니면
미완의 삶을 계속 채워가며
사느냐는 각자 판단할 몫이라는 것.
하지만 어떤 것이든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저는 앞서 말한
‘So What’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내 삶을 돌이켜 보면
결코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는,
온갖 오류투성이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뭐 어떻다는 거야?
어쨌든 다 내 삶인데’라며
날숨을 내뱉었죠.
그렇게 살았을 뿐인데
어느 날 보니 커피도 내리고
재즈 강연도 하고 사진도 찍고
책도 기획하고 있더라는 거죠.”
비수 같은 인생을 카메라에 담다
그는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전문 사진작가가 아닌,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의미에서의 포토그래퍼로 한정한다.
아버지가 물려준 오래되고 낡은
‘Rollei 35’라는 조그만 수동 필름 카메라는
취향을 부추기는 데 알맞다.
“저도 예전에는 남들처럼
예쁜 것, 멋있는 것, 속칭 ‘좋아요’를
받을 만한 피사체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를 읽고
내가 여태 쫓아다닌 것은 스튜디움
즉, 그저 관습화된, 보편적인, 평균에
불과한 보기 좋은 것이라는 걸 알았죠.
그래서 오직 나만의,
가슴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찌르는
‘푼크툼’을 찾아다니게 됐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것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사람도 인생도 그렇다.
다들 멋진 것, 아름다운 것,
빛나는 것을 찾는다.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중요하지 않음을 알게 되는
비수 같은 날은 오고
그 순간이 바로 인생의 푼크툼이 된다.
그 이후에는 존재 그 자체가
아름다운 피사체가 됨을
숙명적으로 알게 될 것이다.
강약 조절, 완급이 중요한
책 읽기와 인생 살기
“책과의 인연도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됐네요.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사 오신
세계위인전집을 단숨에 읽느라
그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안과에
다녀야 했습니다.
그때 길든 습관으로
지금도 여건만 되면 책을 읽어요.
읽는다는 것은 가장 능동적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책 읽을 때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치로
읽지 않고서는
살 수 없습니다.
저는 Homo Readiens입니다.”
친구가 만든 서점 <우주소년>은
오픈 때부터 함께했다.
현재는 마을 주민들이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하는데
이곳에서도 경성현 씨는
재즈 감상회를 정기적으로 진행한다.
또한 작은 출판사를 겸하는
<우주소년>에서 기획위원으로도 참여한다.
그만의 책 읽는 방식이 있는지,
책 읽는 습관이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위한 팁이 있는지 물었다.
“여러 책을
동시다발적으로 읽는 편입니다.
쉽고 편한 책,
어려워도 꼭 읽고 싶은 책,
신간, 고전, 교양서 등
부류를 다양하게 조합해
상황별로, 마음 가는 대로 고르면
완독이나 속도에 대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어요.
몸에 배면 의외로 집중하며
많은 책을 읽을 수가 있어
강력히 추천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목록은 어떨까 궁금해졌다.
“하나의 카테고리를 소개하자면
허먼 멜빌의 <모비 딕>,
카프카의 <변신>,
안톤 체호프의 <체호프 단편선>,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이 들어 있죠.
읽은 책이 기억나지 않고
금방 까먹는 편이라면
토론이나 독서회 등에 참여해보세요.
말을 나누다 보면 스르르
그 책이 자기 안으로 스며들어요.
책은 혼자 읽는 행위지만
사유는 함께하는 것이 좋습니다.”
롱런의 비결,
서툴러도 즐겁게 가는 것
취미가 직업이 되고
일이 놀이가 되는 것에
조건이나 비결이 있을까?
그는 완전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답한다.
너무 진지한, 완벽한 전문가가
되려고 애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가 아는 것만 얘기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좀 편하고 쉬워진다고,
지속할 여유가 생긴다고.
서로 얘기하다 보면 부족한 게 보이고
그러면 또 채워나가고. 그러한 작업이
지루할 것 같지만 해보면 굉장히
재미있다고 했다.
감히 장담컨대 죽을 때까지
지루하지 않게 살 방법이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등장하는 하녀 리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데미안은 리나를 통해
두 세계의 경계를 넘나든다.
아버지가 지배하는 집
즉, 사랑, 엄격함, 규율, 아름다움
깨끗함의 아폴론적 세계와
하녀 리나가 속한 세계
즉, 도살장, 감옥, 술주정뱅이,
쓰러진 말, 강도, 살인, 자살 같은
디오니소스적 세계다.
결국 아폴론적 요소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가령 규칙적인 화성과 대위법 같은
전통적인 규율이 존재하는
클래식도 중요하지만,
즉흥과 싱코페이션이 존재하는 재즈
역시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특정한 것에만 몰두하다
자칫 게토에 갇힐 수 있다.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든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경계를 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경성현 씨는 알려준다.
중년의 삶.
시작은 늦은 것 같고
끝내기에는 억울한 어중간함.
사그라지지 않는 가슴속 불꽃.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당혹스러움.
재즈를 듣고 사진을 찍으며
철학과 인문학 속에서
길을 찾는 동년배 커피 로스터에게
이정표를 가리켜보라고 했다.
“과거에 좋아했거나
꼭 하고 싶었던 것을 찾아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타인이 부러워서,
알 수 없어서 따라갔다면
십중팔구 실패합니다.
절대 늦지 않았다는
태도도 중요합니다.
애써 전문가가 되려고 하지 마세요.
전문가가 쉬울 리도 없고요.
끝까지 아마추어로 남는다고 해도
끊이지 않고 배우는 게 오히려
큰 활력과 만족을 줍니다.
그리고
늘 ‘Let’s Talk About…’
하세요.”
커피와 재즈, 사진과 인문학의
은총이 한 사람에게 귀결된다니
왠지 불공평해 보였는데
비결을 듣고 보니 그리 어렵지 않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아마추어로 꾸준히 살라고 하니,
늘 수다를 떨라고 하니
충분히 해볼 만하다.
그래서 마음먹는다.
오늘은 ‘아마추어 인생’ 1일 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