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역사를 간직한 근대골목의 오후
미뤘던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왔던 대구다. 언제쯤 발걸음을 떼어볼까 기회만 보던 차에 쏟아지는 가을볕에 몸을 일으켰다. 표를 끊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1시간 50분, 이렇게 가까운 곳이었던가. 대구의 심장부를 거닐기로 했다. ‘중앙로’라고 불리는 곳. 대구의 역사를 간직한 골목이 그곳에 있었다.
도시 여행이 좋은 이유는 편리한 교통이 있어서다. 굳이 차를 가져가지 않아도 이동에 큰 문제가 없다. 특히나 대구처럼 규모 있는 도시는 지하철을 따라 어지간한 곳은 다 다닐 수 있다. 동대구역에서 지하철을 타면 중앙로역까지는 불과 15분 거리다. 서울역에서 KTX 좌석에 앉은 지 불과 두 시간 남짓 지났을 뿐인데, 몸은 이미 중앙로역 한복판에 서 있다. 역내 지도를 찬찬히 들여다보니 가고 싶은 목적지는 4번 출구에서 멀지 않았다.
대구의 근대골목. 불과 10년여 전까지만 해도 대구를 여행지로 여기는 사람이 드물었다. 이유는 다양하다. 여름에는 너무 덥고, 음식이 맛이 없고, 볼 게 없다는 얘기가 주였다. 물론 이 모든 이유는 선입견일 뿐이다. 근대골목은 대구의 역사를 보여주는 거리로 잘 정비돼 있다. 이것만으로도 대구를 여행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근대골목이라는 이름만 들었을 때는 특정 구간의 골목 안쪽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근대골목은 단순히 하나의 골목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근현대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중앙로 일대의 모든 곳이었다. 이 길을 걸으며 골목 안에 감춰진 이야기를 찾아다니는 근대골목 투어도 만들어져 있다. 대구에 사는 이에게는 자부심을 되찾아줄 콘텐츠이고, 대구로 여행 온 사람에게는 숱한 이야기를 간직한 보물창고와도 같은 것일 테다.
성의 동쪽 길, 동성로
대구에서 ‘동성로’라는 이름은 번화한 젊음의 거리와도 같은 의미다. 밤낮 할 것 없이 대구의 트렌드를 이끄는 모든 것이 이 거리에 모여 있다. 아무도 그 이름이 가진 의미를 주목하지 않았다. 동성로는 그저 동성로일 뿐이었고, 대구의 중심부 어딘가에 있는 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근대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비로소 깨닫게 된다. 동성로라는 이름은 성의 동쪽 길이라는 의미였음을. 당연히 북성로와 남성로도 존재한다는 걸 거리에서 배운다. 여행이란 이렇듯 새로운 무언가를 공부하는 시간이어서 좋다. 끊임없이 여행길에 오르고 가보았던 곳을 다시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앙로역 4번 출구로 나와 곁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멋들어진 건축물을 만난다. 경상도 일대의 정치, 경제, 사법, 행정, 교육, 문화 등 모든 것을 총괄하던 자리가 바로 이곳이다. 선조34년인 1601년에 설치된 경상감영이 여기에 있었기에 400년간 대구는 한강 이남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기능했다. 한반도 남부의 중심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경상감영 터를 중심으로 이 일대에는 총 다섯 개의 근대골목 코스가 만들어졌다.
한반도 최초의 서양 사과나무
경상감영에서 시작해 달성토성까지 이어지는 1코스부터 선교사들이 활동하던 동네에서 대구화교소학교까지 이어지는 2코스, 서문시장에서 대구읍성을 휘돌아 걷는 3코스,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서 봉산문화거리를 지나 건들바위까지 찾아가는 4코스,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 성당에서 반월당을 잇는 5코스까지. 각 코스의 규모도 규모이거니와 각각의 특징이 남다르고 여기에 스며든 옛 이야기도 서로 다르다. 이번에는 욕심을 버리고 대구의 중심에 자리한 2코스만 살피기로 했다.
코스의 시작을 대구화교소학교 인근부터로 잡으면 훨씬 수월하겠지만, 굳이 언덕을 올라 선교박물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동산선교사사택이라 불리는 청라언덕이다. 이곳에 근대의 의료시설인 제중원이 들어섰고, 선교사들도 여기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의 사택 두 동이 지금도 남아서 이 언덕에 묘한 감흥을 더한다. 전형적인 서양식 사택이다. 대구읍성의 성 돌을 가져와 기초로 삼았다는 스윗즈 사택의 전망 좋고 볕도 잘 드는 곳에 앉았다. 지금은 연인들이 길을 걷다 사택 바로 앞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쉬어 가는 산책 명당이다. 그 바로 옆에 대구에 최초로 들어온 사과나무 기념비가 있다. 1899년 동산의료원을 개원하던 당시 미국에서 들여온 한국 최초의 서양 사과나무인데, 이 나무에서 비롯한 것이 바로 능금이다. 지금은 자손목이 남아서 그 맥을 잇는다. 대구를 대표하는 과일로 사과나무를 거론하게 된 것은 불과 100년 전 이곳에서 시작된 것이다.
대구에서 이 언덕은 또 하나의 큰 의미를 지닌다. 이곳에서 대구의 3·1운동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청라언덕에서 중앙로 방향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당시 일제의 감시를 피해 대구의 학생들이 거사를 꾸미던 피신처이기도 했다. 이제는 그 길이 3·1운동길로 지정돼 있다.
대로를 건너면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독립을 위한 염원과 저항으로 생을 보낸 위인의 흔적을 만나는 구간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썼던 이상화 시인의 가옥과 국채보상운동을 이끈 서상돈 선생의 가옥이 바로 곁에 이웃해 있다. 아파트로 둘러싸인 안에서도 아직 그네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고 남았으니 다행이다.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석양이 이상화 시인의 가옥 안으로 하루의 마지막 햇살을 비춘다. 그 빛에 알알이 영근 석류가 더욱 붉게 물들어 있다.
대구의 소울 푸드 육개장
근대골목 2코스는 진골목에 이르렀을 때 절정을 맞이한다. 성벽의 남쪽인 남성로를 지나 대구읍성 안쪽으로 들어오면 반월당에서 동성로로 이어지는 번화가와 가깝다. 이 일대는 과거 대구 화교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지금도 이 골목 인근에는 오래된 중국요리집이 많다. 진골목은 번화가 뒷골목을 사선으로 이어주는 길인데, 현란한 간판이 가득한 도로변과 달리 고즈넉한 운치가 돋보인다.
진골목이라는 단어는 유난히 정겹게 다가온다. 길가에 선 게시판을 보니 진골목이라는 단어는 ‘긴 골목’이라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라고 적혀 있다. 약전골목의 샛골목이라고 적혀 있는 대로 이 부근에서는 약재의 향기가 도드라진다. 골목을 따라 꽤나 역사가 있을 법한 가게들이 차례로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곳은 약전골목을 찾아온 이들이 식사를 하거나 한잔 기울이던 곳이 아닐까 싶다.
골목을 거슬러 올라가다 ‘진골목식당’이라는 간판을 마주한다. 대구에 오면 꼭 들러보겠노라 점찍어 두었던 집인데, 육개장으로 이름이 높다. 1980년대 골목 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는 좁은 안쪽으로 들어가면 이 집만의 마당 풍경이 나온다. 아침나절부터 부지런을 떨었던 흔적이 역력한 솥이며 대야 따위가 수돗가 주변에 정갈하게 정리돼 있다. 입구 곁에는 실한 크기의 호박이 쌓여 있었다. 이야말로 가을에 더없이 어울리는 풍경이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면 이 집의 진가가 드러난다. 오래되어 반질반질 윤이 나는 대들보와 서까래. 그 아래에 걸린 오랜 편액 등이 건물의 역사를 말한다. 실제로 이 집은 100년이 넘은 문화재급 가옥이다. 여기에서 육개장 장사를 시작한 건 대략 40년쯤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현재 주인인 장복임 씨는 전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이어받은 인물이다. 그게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인데, 그의 육개장 끓여내는 솜씨는 자타가 공인할 만큼 기가 막히다.
주문을 하고 10분 정도 기다리니 육개장과 호박전이 나왔다. 이 집을 굳이 찾아온 이유는 바로 이 육개장과 호박전 때문이다. 대구의 육개장은 독특하다. 대파를 잔뜩 넣어서 푹 끓여낸 달큼함으로 국의 맛을 결정짓는다. 이 국에서 주연은 소고기와 대파다. 토란대 그리고 다진 마늘 정도가 조연으로 참여할 뿐이다. 국물을 떠서 입에 밀어 넣으면 이내 “이야!”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조금도 자극적이지 않지만 충분히 칼칼하고 입에 착 달라붙는 맛이다. 흰밥과 국물을 절반쯤 따로 먹다가 남은 절반은 국에 말아서 기어이 바닥까지 비운다. 이렇게 해야만 국밥의 맛을 온전히 누렸다는 생각에 비로소 만족을 느낀다.
개운한 대구식 육개장을 두고 ‘부산에 돼지국밥이 있다면 대구에는 육개장이 있다’는 말까지 나오니, 대구를 이야기함에 있어 앞으로는 육개장을 빼놓을 수는 없을 듯하다. 오죽하면 육개장이 대구의 소울 푸드라는 소리까지 나올까. 곁들여 시킨 호박전은 가을께에 1년 치 호박을 쟁여놓고 1년 내내 전으로 부쳐 낸다. 육개장의 매콤한 맛을 호박전으로 은근하게 눌러주는 궁합이 썩 괜찮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배를 두드리고 앉아 있었더니 주인인 장 씨가 힐끗 쳐다보곤 슬며시 웃는다. 대구 음식은 맛이 없다고?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소리다. 대구의 육개장 맛 좀 보라지. 앞으로 다시는 그럴 소리를 못 하게 될 게다.
담당·최승영 기자
글과 사진·정태겸(여행작가)
■ 대구 근대골목
대구는 한국전쟁 당시 포화의 피해를 많이 입지 않았다. 덕분에 전후의 생활상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대구 근대골목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보여주는 흔적이 잘 남아 있어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곳이다. 총 5개의 코스로 구성한 근대골목 투어는 대구의 감춰진 매력을 잘 보여준다.
주소 대구 중구 서문로1가 84
문의 053-661-2624
■ 진골목식당
대구식 육개장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집이다. 대파로 맛을 내는데, 대구의 다른 육개장집과 비교해도 큼지막한 대파를 아낌없이 넣는 게 특징이다. 푹 고아진 대파는 국물의 감칠맛을 한껏 돋운다. 가을에 1년 치를 미리 쟁여둔 호박으로 부쳐 내는 호박전도 이 집만의 특별한 별미다.
주소 대구 중구 진골목길 9-1
문의 053-253-3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