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희망 찾는 로드 무비
여행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은 오랫동안 관객의 사랑을 독차지해왔다. 이렇게 여행이나 장소의 이동 등을 통해 이야기가 진행되는 영화를 ‘로드 무비’라고 한다. 이런 영화들은 길(路)이 주는 인생의 상징성을 주제로 활용하며, 흔히 여행과 함께 주인공이 성장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만약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다면 먼저 여행을 위한 감수성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이럴 때 잠들어 있는 ‘여행심’을 자극하는 최고의 영화는 단연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2011)다.
앨런 감독의 흥행작답게 누구나 이 영화(동시에 파리)와 사랑에 빠지는 데는 몇 분이면 충분하다. 영화는 3분이 조금 넘는 오프닝에서 시드니 베쳇의 1950년대 명곡 ‘Si Tu Vois Ma Mere’가 흐르는 동안, 파리를 대표하는 건축물, 거리 및 노천카페 등의 아름다움을 낭만적으로 보여준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파리를 소환하는 주문으로 언제든지 쓰일 만하다.
파리에 대해 “믿을 수 없다!“고 외치는 작가 길(오웬 윌슨)은 이 도시를 찬송하기에 분주하다. 약혼자와 여행을 온 그는 홀로 파리의 밤거리를 배회한다. 우연히 자정이 넘어 차를 얻어 타는데,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과거로 가서 파리의 예술가들과 만난다. 길이 현실에서 여행하는 파리도 멋지지만, 그가 동경하는 1920년대의 세상이 펼쳐지며 파리의 낭만은 극대화된다. 몽상가였던 그는 옛 파리(과거 시대에 대한 동경)를 여행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서서히 깨닫게 된다. 파리와 사랑에 빠진 이 남자는 결국 파리에서 새 삶을 시작하게 된다. 이미 <미드나잇 인 파리>에 흠뻑 중독된 분들이라면, 벨 에포크 시대(19세기 말)의 파리로 안내하는 미셸 오슬로 감독의 깜찍한 애니메이션 <파리의 딜릴리>(2019)를 극장에서 만나는 것도 좋다.
애초에 친구나 가족과 함께 떠나는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도 있다. <트립 투 잉글랜드>(2010)의 중년 배우,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은 옵저버 매거진의 의뢰로 직접 차를 몰고 영국 북부의 레스토랑을 방문하는 여행을 6일 동안 떠난다.
영화는 유명한 레스토랑의 시그니처 요리를 맛보는 미식 여행과 배우들이 자신의 연기와 삶에 대해 토로하는 리얼리티 쇼가 공존하는 모양새다. 즉 요리를 눈으로 즐기는 동시에 중년 배우의 삶에 대해 슬쩍 엿볼 수 있는 재미를 선사한다. 시종일관 유명 배우 흉내(성대모사)를 내거나 특정 연기에 대해 설왕설래하는 두 배우는 스탠딩 개그를 하듯 여행을 정신없게 만든다. 어쩌면 삶과 연기에 대한 개똥철학을 논하는 떠버리 친구(?)와 동행하는 것도 여행의 맛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들과 함께하면 심심하다는 성토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들의 떠들썩하고 놀라운 여행은 <트립 투 이탈리아>(2014), <트립 투 스페인>(2017)으로 이어진다. 이 시리즈는 꼭 제작년도 순으로 감상할 필요는 없다. 여행을 떠나고 싶은 지역을 먼저 골라도 무방하다.
두 남자의 자동차 여행이라면 2019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그린 북>(2018)을 빼놓을 수 없다. 1960년대 피아니스트 돈 셜리의 실화를 토대로 한 영화로,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다혈질 토니(비고 모텐슨)가 미국 남부 투어를 떠나는 흑인 뮤지션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의 운전기사가 되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담고 있다.
이 여행에서 두 사람은 각각 자존심을 내세우며 티격태격하지만 위험한 순간 서로를 의지하면서 남부 투어를 무사히 마치게 된다. 이 로드 무비는 성 정체성, 계급, 인종뿐만 아니라 성장 배경이나 주위 환경까지, 모든 것이 너무 다른 두 남자가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결국 친구가 되는 과정을 그린다. 60년대 남부의 인종 차별 문제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의 여행이 이런 편견과 차별을 넘어서는 치유의 과정이 될 수 있음을 묵묵히 역설한다. 보통 여행에서 설렘을 주는 것 중에 하나가 좋은 음식인 것처럼,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차 속에서 토니가 맨손으로 치킨을 먹어보라고 돈 셜리에게 권유하는 장면이다. 그냥 손으로 치킨을 먹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결벽증이 있는 그는 토니의 놀림을 받으며 결국 맛을 즐긴다. “폭력으로 절대 이기지 못한다. 항상 이기는 무기는 품위다”라고 역설하는 돈 셜리와 주먹질에 익숙한 토니가 한마음이 되는 것은 어떤 논리나 사상이 아니라 저렴하지만 맛있는 치킨을 나누면서다.
이 마법의 치킨이 식욕을 돋우는 것처럼, 매콤한 인도의 향으로 형제에게 특별한 순간을 선사하는 영화가 있다. 형제의 오디세이 <다즐링 주식회사>(2007)에서 각양각색의 세 남자 프란시스(오웬 윌슨), 피터(애드리언 브로디), 잭(제이슨 슈왈츠먼)이 다즐링 리미티드 열차를 타고 인도 여행을 떠난다.
도시의 삶에 찌든 이들은, 여행을 통해 끈끈한 형제애를 다질 것이라 기대하지만, 끊임없이 다투면서 오히려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다. 하지만 일련의 사고(인도 소년의 죽음)와 모성애를 기대할 수 없는 엄마와의 재회를 통해 이들은 진짜 어른으로 거듭난다. 영화 엔딩에서 이들은 다시 기차에 오르면서 그간 여행에 갖고 다녔던 가방(아버지의 유품이자 그들 인생의 허울뿐인 짐)을 모두 버린다. 훌훌 털어버린다. 삼형제는 상실감에 빠진 자신의 모습과 대면하면서 용기를 회복하고, 삶의 의미를 되찾는다. 이들의 좌충우돌 여행을 따라가다 보면 ‘인생의 열차’으로 상징되는 다즐링 리미티트에 단숨에 올라타고 싶어진다.
혹시 다른 방식의 기차 여행을 원한다면 <리스본행 야간열차>(2013)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제레미 아이언스)처럼 즉흥적인 선택에 모든 것을 맡길 필요도 있다.
우연히 자살 시도를 하는 여인을 구해준 그는 미지의 그녀가 남기곤 간 티켓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탄다. 강렬한 끌림으로 무심코 여행을 시작한 그는 쳇바퀴처럼 도는 일상에서 벗어난다. 사실 영화 속의 이런 여행은 굳이 디즈니식의 마법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일단 마음 가는대로 기차표를 사고 기차에 올라타 시간의 흐름을 즐긴다. 이렇게 가다 보면 기차의 종착지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운에 맡기면 된다. 희망을 찾는 여행은 아주 작은 선택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