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멘토는 있다
일찍이 인문학자 우치다 다쓰루는 저서 <스승은 있다>에서 연애가 오해에서 비롯하듯 사제 관계도 본질적으로 오해에 기초한다고 얘기했다. 오히려 “나의 스승은 최고!”라는 다양한 오해 때문에 제자들이 고유한 성숙의 과정을 밟아갈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친다. 즉 이 배움의 과정이 중요한 것은 ‘훌륭한’ 스승이 아니라 ‘스승이 있다’는 사실에 기반한다는 점이다. 스승과 제자라는 두 명의 참가자만 있으면 성립되는 것이 바로 배움이다.
굳이 영화광이 아니라도 고(故) 로빈 윌리엄스가 출연한 두 편의 영화는 뇌리에 남아 있을 만하다. ‘카르페디엠(현실에 충실하라)’이라는 라틴어를 유행시킨 <죽은 시인의 사회>(1989)와 상처 입은 천재 제자에게 “네 잘못이 아니야”라며 위로를 건네던 <굿 윌 헌팅>(1997)이다. 스크린 속의 윌리엄스(오, 캡틴!)는 우리가 평생 꿈꾸었을 스승의 이상향을 보여주었다. 만약 젊은 시절에 이런 스승을 만났다면 내 인생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다.
물론 이런 아름다운 인물이 한국 영화에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 있지만, 사실 2010년대에 성공한 ‘1000만’ 한국 영화에는 스승을 갈망하는 징후들이 담겨 있다.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명량>(2014)처럼 관객의 사랑을 독차지한 영화는 단순히 사극의 재미 뿐만 아니라 리더(지도자)에 대한 갈증을 반영한 결과물이었다. 우리에게 이상적인 지도자나 왕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영화의 신바람을 일으킨 숨은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좋은 지도자를 갖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였고, 더불어 현실에서 결코 충족되지 않는 좌절(혹은 상실)을 겪어왔다. <변호인>(2013) 역시 그런 맥락에서 잃어버린 리더(대통령)를 그리워하고 애도한다.
어쩌면 우리는 일상에서, 정확히는 가족, 회사, 학교 등에서 멘토가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도 서투른 초심자에게 삶이나 일의 방향을 친절하게 충고해주지 않는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묵묵히 고군분투하며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할 때가 많다.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스스로 자신의 스승이자 멘토가 되는 길을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멘토에 대한 결핍을 느낀다면, 세 편의 영화 <그랜토리노>(2009), <크리드>(2015), <인턴>(2015)이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실베스터 스탤론, 로버트 드니로처럼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주인공인 영화다.
<그랜 토리노>의 월트(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식과의 대화가 단절된 고집불통의 노인이지만 옆집의 몽족 소년 타오를 도우면서 점차 삶의 안정을 되찾는다. 한국전쟁에 참전해 트라우마를 입은 그는 “나한테 뭘 보고배워? 난 좋은 사람 아니다”라고 단언하지만 소심한 소년에게 진짜 남자가 되는 법을 코치하고, 타오가 갱단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다. 심지어 자신의 분신 같은 1972년산 그랜 토리노를 타오에게 선물하고, 월트의 유산은 그를 영웅으로 생각하는 소년에게 고결하게 전해진다.
<크리드>는 <록키> 시리즈의 번외편 같은 영화다. 아내 애드리언을 떠나보내고 홀로 식당을 지키는 노년의 록키(실베스터 스탤론)는 애증의 라이벌 아폴로 크리드의 아들 아도니스(마이클 B. 조던)를 만나 다시 열정을 되찾는다. 록키는 더이상 링 위의 정복자가 아니지만 젊은 도전자에게 그곳에서 살아남는 노하우를 코치한다. 영화 엔딩에서는 록키의 상징으로 불리는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계단(전설 적인 ‘록키 스텝스’)을 아도니스와 함께 걷는다. 암에 걸린 그는 자기 아들이나 백인 선수가 아니라 흑인 후계자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이처럼 월트나 록키는 세대와 인종을 넘어 진정한 멘토로 거듭나면서 뜻하지 않게 마음의 안식을 얻는다. 이들은 멘토가 되면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행운을 누린다.
반면 <인턴>에서 은퇴 후 홀로 된 노년의 벤(로버트 드 니로)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계속 움직여야 한다는 걸 깨닫고 삶에 난 구멍을 채우고 싶다는 의지로 여성의류 회사(About The Fit)의 시니어 인턴 프로그램에 지원한다. 젊은 여성 대표 줄스(앤 해서웨이)의 비서로 선발되면서 직장 생활 노하우와 인생 경험을 토대로 그녀를 서포트하게 된다. “당신의 세계를 배울 수 있고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자부하는 그는 늘 슈트를 입고 매일 면도를 하고 1970년대 가방을 들고 다닌다. 자신만의 전통적인 스타일을 고수하지만 시대착오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장점을 통해 입증한다.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벤은 회사와 일뿐만 아니라 가족, 연인에 대한 인생 조언까지 해주는 상담자가 된다. 일과 삶의 균형을 유지하기 어려워하는 줄스에게 벤은 유연한 비서이자 언제나 지원을 아끼지 않는 아버지처럼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리매김한다. 벤은 젊은이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찾으면서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멘토로 인생을 즐긴다.
이 세 편의 영화는 각양각색의 재미와 감동을 선사할 뿐만 아니라, 배움에 대해 재고하게 한다. 배움이라는 관계는 기적처럼 스승과 제자, 멘토와 멘티 모두를 바꾸어 놓는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젊은 시절에 동경하던 멘토가 직접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노년의 주인공들, 바로 왕년의 마초들이 일깨운다는 점이다. 늘 좋은 멘토가 내 삶에 나타나기를 막연하게 기다리며 시간을 흘려보냈다면, 이제는 우리가 직접 멘토가 될 순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