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 혹은 나, 자신과 화해하기
연말연초는 정리의 시간.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오해나 다툼으로 소원한 사람들이
화해와 용서를 통해 더 성숙한
관계 맺음을 이룰 수 있다.
나 자신과의 관계를
되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불안의 책>에서
“타인의 존재는
항상 고통이고 불안”
이라고 얘기한다.
때로
타인은 우리 마음을 멍들게 하는 존재지만,
결국 그들과 화해하고 함께하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용서와 화해’는
가족 영화가 선호하는 테마 중 하나다.
짐 자무시 감독의
<브로큰 플라워>(2005)에는
무료함에 빠진 중년의 독신남
돈 존스턴이 등장한다.
어느 날 돈은 익명의 편지를 받는다.
미지의 여인으로부터 온 편지에는
그에게 19세 아들이 있다는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다.
진실을 알기 위해
그는 옛 애인들을 찾아간다.
그를 온몸으로 환대하는 로라부터
문전박대하며 화내는 페니까지
각양각색의 여성들과 재회한다.
주인공 이름이 ‘돈’이라는
사실에서 눈치챌 수 있듯
그는 전설의 바람둥이
돈 후안을 연상시킨다.
돈 후안에게 중요한 것은
여성을 수집하고 정복하는 것이기에
진심으로 사랑에 빠지는 일은 없었다.
한마디로, 영혼에 미동조차
일어나지 않는 남자가 돈 후안이다.
그러나 그는 아들의 존재를 알고 회한에 빠진다.
돈이 옛 여인들을 찾아가는 여행은 사실상
과거의 자신과 대면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물론 그녀들에게 용서를 구하지는 않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알려고 하는 것은
인간적 공감을 파괴한다”
라는 철학자 돈스키스의 충고처럼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는다.
한편 하와이를 무대로 한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디센던트>(2011)는
보트 사고로 코마 상태에 빠진 아내를 둔
변호사 맷 킹의 일상으로 안내한다.
아내, 아이들과 대화가 없는 점에
죄책감을 느끼던 맷은 앞으로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겠다고 다짐하지만,
그에게 닥칠 운명은 가혹하기만 하다.
결국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맷은
딸들과 함께 친척과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 한다.
그 과정에서
아내가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맷은 마음에 상처를 입지만
죽음을 앞둔 아내를 위해 무던하게
마지막 이별을 준비한다.
눈물을 흘리며
의식이 없는 아내에게
작별 키스를 하는 그는
“그녀가 자신의 고통이자 기쁨”
이었다고 고백한다.
이렇게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없는 아내에게
용서와 화해를 구한다.
여기서 맷은 “가족은 군도와 같다”고 말한다.
영화는 맷의 가족을 통해 군도처럼 서로
독립적이면서 이어져 있는 가족을 보여준다.
맷은 아내를 잃은 상실감에 휩싸이지만
반항아 큰딸 알렉산드라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팔지 않기로 한다.
케네스 로너건 감독의
<맨체스터 바이 더 씨>(2016)는
한순간의 사고로 가족을 잃어버린
남자의 이야기다.
보스턴에서 아파트 관리인으로 일하며
홀로 사는 ‘리’는 형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돌아간다.
하지만
형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자신이 조카 패트릭의
후견인으로 지목된 것을 안다.
조카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리에게는 이 상황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더욱이 조카는
보스턴으로 함께 가지 않겠다며 충돌한다.
영화는 전 부인 랜디와 재회한 이후,
리에게 일어났던 사건을 묵묵히 풀어놓는다.
아이들을 잃고 자살 시도까지 했던 리는
오랫동안 자신에게 벌을 주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는
마치 행복이나 기쁨을 누리면
안 되는 죄인처럼 감정이 없는,
소진된 삶을 이어간다.
자신이 못되게 굴었다는
아내의 진심 어린 사과와
위로조차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상실의 고통, 가족을 잃은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없는 리는 조카 패트릭과 함께하는
삶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인다.
다시 가족을 되찾을 순 없지만,
리와 패트릭은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간다.
이렇듯 가족을 용서하고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은
새로운 삶으로 한 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로
마이크 밀스 감독의
<비기너스>(2010)를 빼놓을 수 없다.
아내와 사별한 후
남은 인생을 솔직하게 살고 싶다며
갑자기 75세에 커밍아웃을 한 아버지 할과
아들 올리버의 이야기다.
부모의 불행한 관계에 영향을 받은
올리버는 독신남이 되었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깊은 슬픔에 잠긴다.
올리버는 우연히 파티에서 만난
프랑스 배우 애나와 사랑에 빠진다.
암 투병을 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아버지와
그를 잊지 못하는 아들이
연인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과정을 보여준다.
반려견 아서와 지내던 올리버는
스스로를 가두던 벽을 허물고
다시 세상으로 나간다.
위의 영화들은
가족이나 연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되찾는 ‘회복’을 보여준다.
애꿎게도 가족이나 타인으로부터
상처를 입거나 혹은 상처를 주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영화들이
전해주는 진실은, 용서와 화해가
타인과의 관계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먼저 스스로를 용서하고
자신과 화해할 때 타인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
삶의 굴레, 불안과 죄의식 때문에 포기했던
자유와 행복을 다시 얻은 남자들,
자신과 화해한 이들에게
일상은 축복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 새로운 삶을 펼칠
2막이 기다리기 마련이다.
인생에 너무 늦은 때란 없으니까.
담당·임상범 기자
글·전종혁(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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