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음식을 함께하기
한국영화에는 으레 식탁이 등장한다.
온 가족이 모여
즐겁게 찌개를 먹는 모습은
아주 익숙한 장면 중 하나다.
함께 밥을 먹는 것이 ‘식구’인 것처럼,
음식은 누군가와 함께 먹으면서
기쁨을 나눌 때 삶이 풍요로워진다.
이 소중한 가치를
음식영화가 새삼 일깨워준다.
<김씨 표류기>(2009)에는
자살을 시도했다가 홀로 한강 밤섬에
살게 된 남자가 나온다.
김씨(정재영)는
짜장면을 직접 만들어 먹기 위해
옥수수를 키우면서 전력을 다하고,
결국 고생 끝에 짜장면을 먹으면서
눈물을 펑펑 흘린다.
그에게 짜장면은 단순한 요리가 아니라
삶에 대한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무인도에서의 만찬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요리를 만드는 것은
평범한 일상에서 놀라운 사건이 될 수 있다.
노라 에프런 감독의 유작
<줄리 & 줄리아>(2009)가 그렇다.
영화는 두 개의 시간대를 보여준다.
1949년 프랑스의 줄리아(메릴 스트립)와
1961년 뉴욕 퀸스의 줄리(에이미 애덤스).
뭔가 새로운 일을
하고 싶은 그녀들이
점점 요리에 빠져드는
일화를 교차해 보여준다.
줄리아는 프랑스 요리학교에 다니면서
전문 요리사가 되고,
직장 일로 스트레스를 받던 뉴요커 줄리는
셰프 줄리아의 요리책을 보고 365일 동안
524개의 요리를 직접 만들면서
이 과정을 블로그에 올린다.
수란을 만들고 랍스터를 죽이는 등
1년 동안 줄리는 줄리아의 레시피와
함께하며 맛을 즐긴다.
두 여성이 요리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삶에서 음식이 차지하는 비중을
어느새 재고하게 만든다.
우리는 매일 바쁜 일정에 쫓기며
요리를 하고 그것을 먹는 기쁨을
놓치거나 잊고 산다.
하지만 그녀들은 요리를 하는 일이나
음식을 맛보는 것이 얼마나 중독성
강하고 즐거운 일인지 보여준다.
그녀들이 장을 보거나 요리하면서
“정말 행복하다”고 말하거나 “천국!”이라고
감탄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안락하고 편안하게, 가정에서 행복을 찾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음식의 힘이다.
그녀들은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요리라는 마법에서 찾았다.
참고로 영화 속 여주인공인
줄리아 차일드나 줄리 파월의 책이
국내에도 출간되어 있다.
쿡방은 이제 TV나 유튜브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기 푸드 콘텐츠다.
푸드 예능 프로그램이 나오기 전에,
이보다 한발 앞서 스크린에서
푸드트럭의 묘미를 보여준 영화가 있다.
요리가 곧 인생인
<아메리칸 셰프>(2014)다.
요리로 사람들의 삶을 위로하고
거기서 힘을 얻는 일류 레스토랑의
셰프 칼 캐스퍼(존 파브로)는
유명 음식평론가에게 혹평을 받자
그와 심하게 다투고 급기야
레스토랑을 그만두기에 이른다.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된 그는
그간 소원했던 아들과 함께 지낼 겸
미국 전역을 도는 푸드트럭에 도전한다.
그가 자존심을 걸고 만든 쿠바 샌드위치에
사람들이 “맛있다!”라고 열광할 때에는
자연히 군침이 돈다.
한순간 몰락했던 셰프가
푸드트럭의 성공으로 재기한다는
뻔한 스토리지만, 셰프를 소재로 한
어떤 영화보다도 유쾌하다.
셰프의 사랑 이야기나 성공담보다
더욱 관객을 흥분시키는 것은
단순하게도 먹는 기쁨이다.
이 영화는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를
원초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존 파브로가 얼마나 능력이 있는
엔터테이너인지 알고 싶다면,
감독을 맡은 영화 <라이언 킹>이 아니라
제작, 감독, 각본, 주연을 한
<아메리칸 셰프>부터 봐야 한다.
푸드트럭 이름 ‘El Jefe’(보스, 셰프)처럼
보스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진정한 셰프로 거듭나는 이야기
<소울 키친>(2009)의 지노스
(아담 보스도코스)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함부르크에서
‘소울 키친’을 운영하고 있다.
유럽 가장 핫한 도시의 창고 같은 곳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한다는 전제는 환상적이다.
하지만 빈티지 개념으로 리모델링한
핫 플레이스를 상상해선 곤란하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곳은 그냥 낡고 허름한 곳이다.
그는 전문 셰프도 아니고
냉동식품을 대충 요리해
손님들에게 내놓다가
위생국에 지적을 당한 후
주방을 치우면서 허리를 다치고 만다.
새로운 셰프를 고용하지만
요리로 논쟁을 벌이는 탓에
손님들이 나가버리고 만다.
애인도 떠나버리는 최악의 상황에 몰린
지노스는 한바탕 소동을 겪지만 다행히
자신의 레스토랑을 꿋꿋이 지켜낸다.
그의 불행과 좌절은
마치 아름다운 결말을 위한
시련처럼 느껴질 정도로
멋진 엔딩이 준비되어 있다.
그가 좋은 재료를 갖고 정성스럽게
요리를 한 후 연인과 즐기는 장면이다.
단둘이 테이블에 앉아
영혼의 음식을 먹는 동안
루이 암스트롱의
‘The Creator Has
A Master Plan’이 흘러나온다.
프랑스 요리 레시피를 완전 정복하는
줄리/줄리아 프로젝트에 도전하거나
함부르크에서 영혼의 식당을
운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따라 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이 정도 요리는 충분히 가능하다.
<리틀 포레스트>(2018)에서
혜원(김태리)이 만드는 요리다.
“배고파서 내려왔어!”
라고 주장하는 그녀는 서울에서
먹었던 인스턴트 음식으로는
허기를 채우지 못한다.
임용고시에 불합격한
그녀는 잠시 고향으로 돌아와
휴식의 시간을 갖는다.
엄마에게 어깨너머 배운
요리 솜씨를 발휘해 한 끼 한 끼를
정성스럽게 만들어 먹는다.
수제비, 배추전, 삼색 팥떡, 막걸리,
아카시아꽃과 쑥갓 튀김 등을
차례로 만들어 먹는다.
그녀는 고향 친구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행복한 시간을 만끽하고,
잠시 고향에 머물려고 했지만
사계절 동안 제철 음식을 즐기며 눌러앉는다.
이 영화는 요리로 힐링을 선사한다.
어떤 위로보다도 더 따뜻하게 다가온다.
영화가 끝나면 요리를 하려고
냉장고를 뒤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제철 음식을 먹으면서 보내는 하루가
얼마나 풍족한지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다.